김흥경 (조선)
김흥경 金興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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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77년 |
사망 | 1750년 |
성별 | 남성 |
국적 | 조선 |
직업 | 문신 |
상훈 | 분무원종공신 1등 |
김흥경(金興慶, 1677년 ~ 175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자유(子有)·숙기(叔起), 호는 급류정(急流亭), 시호는 정헌(靖獻)이다. 아버지는 김두성(金斗星)이다.[1] 본관은 경주이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고조부이고, 조선 영조 계비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에게는 7촌 아저씨뻘이 된다.
생애
[편집]16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로 임명되고 10년 동안 사서·정언·부수찬·수찬·부교리·사간·집의·응교 등 삼사의 청요직을 지냈다.[1] 이후 승정원 승지, 사간원 대사간 등을 지냈다.[2]
1712년 대사간을 역임하고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 ·대사간 · 경기도 관찰사 · 사헌부 대사헌 ·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1] 경종 때 한성부 우윤을 지냈다.[2] 1721년에는 대사성으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1] 신임사화 때 신병 혹은 친병이 있다고 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 뒤 예조 참판 · 도승지를 지내고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으나 민진원을 구원하다가 도리어 파직되었다.[1]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승정원 도승지가 되고[2] 1725년 예조 참판 · 호조 판서 · 대사헌을 거쳐 음력 4월에 우참찬으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1][2] 그 뒤에 예조판서 · 이조 판서 겸 내국 제조(內局提調)를 거쳐 음력 7월 판의금이 됐다.[1]
1727년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자 신병으로 사퇴했다.[1] 그해 음력 4월 좌참찬에 임명되었으나[1] 뒤에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했다가 해임되었다.[2] 곧 복직되어 우참찬 · 판의금 · 좌참찬 등을 역임했다. 1728년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다가 다시 우참찬 · 판의금 등을 역임했다.[1]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731년 음력 11월 다시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까지 신병을 이유로 조정에 나오지 않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전출되었다.[1] 다시 기용되어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2] 그 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1]
아들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영조와 사돈간이 되었다.[1] 그런데 그의 6촌인 김선경의 손녀이자 김한구의 딸이 뒤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되면서, 왕실과 이중 인척간이 되었다.
가족
[편집]- 조부 : 김세진(金世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