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수
여량부원군 송현수
礪良府院君 宋玹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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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풍저창부사 (朝鮮國 豊儲窓副使) | |
임기 | 1448년 2월 29일 ~ 1454년 2월 23일 |
군주 | 조선 세종대왕 이도 조선 문종 이향 조선 단종 이홍위 |
섭정 | 왕세자 이향 황보 인 김종서 수양대군 이유 |
신상정보 | |
출생일 | ? |
사망일 | 1457년 음력 10월 21일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과천에서 사형(교살)됨. |
국적 | 조선 |
경력 | 동지돈녕부사 |
정당 | 무소속 |
본관 | 여산 |
부모 | 송복원(부) |
배우자 | 여흥부부인 민씨 |
자녀 | 정순왕후(딸) 송거(아들) |
송현수(宋玹壽, ? ~ 1457년 음력 10월 21일)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국구이다. 원래 조선국 풍저창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단종의 장인으로, 정순왕후의 아버지이다.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생애
[편집]출신과 국구 시절
[편집]생년은 명확하지 않다. 여산 송씨 지신공파의 후손으로[1], 지중추원사를 지낸 송복원의 아들이다[2]. 원래 세조의 친구였으며[3], 그 여동생은 세종의 적8남인 영응대군의 부인(대방부부인 송씨)이었다. 이 덕에 특별한 벼슬이 없이 지내던 그는 1445년(세종 27년)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전구부승(典廐副丞)이 되었다[4].
한편 풍저창부사로 있던 1454년(단종 2년) 음력 1월에 그의 딸이 간택에 참여했다가 단종의 왕비(정순왕후)로 책봉되면서[5][6] 그도 동지돈녕부사 및 여랑군에 봉해졌다[7]. 이어 같은 해 음력 6월 1일에 지돈녕부사로 관직이 오르고[8], 다시 음력 12월 2일에 판돈녕부사가 되었다[9]. 한편 세조 즉위 후에는 상왕 단종의 인척임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관장하거나 당상관의 자리에 있다고 하여 탄핵되었으나, 세조의 비호로 그냥 넘어간 적이 있다[10].
단종 복위 운동
[편집]《세조실록》에 의하면 처음에 사육신의 단종 복위 역모에 가담했을 것으로 의심받던 그를 세조가 직접 위로하였다고 한다[11]. 그러나 결국 1457년(세조 3년) 음력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영월로 유배를 가면서 송현수도 하옥되었다[12]. 당시 권완이 '상왕을 다시 세웠으면 매우 좋았을 것이나, 다만 이 일이 쉽지 않았다. 송현수와 교통하면서 역란을 음모하였다.'라고 증언하였고[13], 결국 송현수는 장형 100대에 처하고 먼 지방의 관노가 되었으며, 그 가족들도 역시 같은 곳의 노비가 되었다[14]. 한편 《세조실록》에 의하면, 이 때 여러 차례에 걸쳐 대간에서 송현수를 죽여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세조가 듣지 않았다고 한다[15]. 그러나 결국 음력 10월 21일에 역시 역모에 가담했던 금성대군 및 송현수 등의 처형을 명하여 송현수가 사망하였는데, 단종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6].
한편 세종의 부마로 정현옹주의 남편인 윤사로는 공신이 되자 송현수의 딸을 상으로 받기를 원하였는데, 당시 사관이 실록에 이를 기록하면서 윤사로를 비난하였다[17].
후손
[편집]송현수의 조카인 송영이 예종 때에 감찰로 있었는데, 역도의 무리라 하여 탄핵을 받아 예종의 재가까지 내려졌으나[18] 결국 파직은 되지 않았다[19]. 이어 1475년(성종 6년)에는 송현수의 아들 송거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특별히 허락되었다[20]. 이 때를 비롯하여 대간에서 수 차례에 걸쳐 송현수의 일족에 대해 탄핵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21][22].
한편 1767년(영조 43년) 영조가 송현수의 후손을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는데[23], 나주에 살던 송익량이라는 자가 송현수의 후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가 적발되어 곤장 60대를 맞는 일이 있었다[24].
복권
[편집]사후 약 240여 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송현수도 복권되고, 관향인 여산도 군에서 부로 승격되었다[25]. 또 이듬해부터는 그와 부인 민씨에 대해서 제사를 다시 올리게 되었다. 당시 숙종은 과천에 있던 송씨의 선산에 사람을 보내어 그 묘를 찾게 하였으나, 송현수의 무덤과 그 후손들은 찾지 못해 이 때 무덤을 수축하였다. 부부인 민씨의 묘는 비석에 희미하게 남은 글씨로 식별할 수 있었다[26].
이어 정조 때인 1791년(정조 15년) 음력 2월 장릉 배식단의 정단에 배향할 32명 중 1명으로 선정되었으며[27], 정민(貞愍)의 시호가 내려졌다[28]. 이해 음력 9월에는 그의 무덤에 치제하고 작은 표석을 세우고, 묘지기 2명을 두었다[29]. 또 그의 후손을 등용케 하였다[30].
가족 관계
[편집]같이 보기
[편집]출처
[편집]- ↑ 김성회 (2014년 3월 25일).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0〉 송씨(宋, 松氏)·여산송씨(礪山宋氏) 시조 송유익 고려때 공 세우며 기틀 마련… 조선 들어 명문가로”. 세계일보. 2016년 6월 15일에 확인함.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송현수〉항목
- ↑ 《두산백과》〈송현수〉항목
- ↑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4월 25일 무진 2번째기사
- ↑ 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1월 8일 경신 1번째기사
- ↑ 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1월 10일 임술 4번째기사
- ↑ 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1월 14일 병인 2번째기사
- ↑ 단종실록 11권, 단종 2년 6월 1일 임오 3번째기사
- ↑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12월 2일 무인 1번째기사
- ↑ 세조실록 6권, 세조 3년 2월 14일 무신 1번째기사
- ↑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13일 신해 1번째기사
- ↑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6월 21일 계축 2번째기사
- ↑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7월 15일 병자 3번째기사
- ↑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8월 16일 정미 1번째기사
- ↑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8월 30일 신유 2번째기사
- ↑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1일 신해 2번째기사
- ↑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4일 갑인 3번째기사
- ↑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 7월 24일 을사 1번째기사
- ↑ 성종실록 5권, 성종 1년 5월 13일 경인 2번째기사
- ↑ 성종실록 52권, 성종 6년 2월 26일 을사 5번째기사
- ↑ 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8일 경술 1번째기사
- ↑ 성종실록 157권, 성종 14년 8월 23일 계미 2번째기사
- ↑ 영조실록 109권, 영조 43년 8월 6일 정묘 2번째기사
- ↑ 영조실록 109권, 영조 43년 11월 23일 계축 2번째기사
- ↑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12월 28일 무진 1번째기사
- ↑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7월 15일 임오 2번째기사
- ↑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 2번째기사
- ↑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5일 경오 1번째기사
- ↑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9월 24일 병신 1번째기사
- ↑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9월 25일 정유 1번째기사
- ↑ 가 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송영〉항목
- ↑ 이정근 (2011년 12월 2일). “'왕비' 낳으려거든 이곳으로 발 뻗어라”. 오마이뉴스. 2016년 6월 15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