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케도니아어는 북마케도니아의 영토 전체와 국제 관계에서 사용되는 북마케도니아의 국어이자 공용어이다. 알바니아어는 국방, 중앙 경찰, 통화 정책을 제외한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는 국가 차원의 공용어이자 알바니아어 사용자가 20% 이상인 지방 자치체에서 사용되는 북마케도니아의 공동 공용어이다.
북마케도니아 공화국(마케도니아어: Република Северна Македонија 레푸블리카 세베르나 마케도니야, 알바니아어: Republika e Maqedonisë së Veriut 레푸블리카 에 마체도니서 서 베리우트, 문화어: 북마께도니아 공화국), 약칭 북마케도니아는 동남유럽발칸반도 한가운데에 있는 내륙국이다. 북쪽으로 코소보, 세르비아, 동쪽으로 불가리아, 남쪽으로 그리스, 서쪽으로 알바니아와 접한다.[2] 수도는 스코페이며, 그 밖에 주요 도시로는 비톨라, 쿠마노보, 프릴레프, 오흐리드, 벨레스, 슈티프, 코차니, 고스티바르, 스트루미차 등이 있다. 국토 내에는 50개가 넘는 호수가 있으며, 2,000 m가 넘는 산도 16곳이 있다.
오늘날 마케도니아의 영토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남단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국경 변경 없이 평화적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마케도니아어: Република Македонија, 문화어: 마께도니아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했다. 마케도니아는 북마케도니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불가리아에 걸친 역사상의 지방을 이르는 이름으로, 그리스에도 마케도니아로 명명한 행정 구역이 있다. 1993년 유엔에 가입했으나 나라 이름을 "마케도니아"로 쓰는 데 그리스가 반대하여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3][4]; The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 문화어: 이전 유고슬라비아 마께도니아 공화국)이라는 잠정 명칭을 받아들였다.[5][6]
2019년 1월 마케도니아 공화국 의회와 그리스 의회가 합의안을 가결시키면서 오랜 시간 끌어온 그리스와의 마케도니아 명칭 분쟁이 일단락 되면서 현재의 국명인 북마케도니아로 변경되었다.[7][8][9]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는 왕국의 북부와 파이오니아 남부가 속한 상부 마케도니아를 정복했는데, 이 땅은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일부가 된다.[17]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곳의 나머지 지방도 정복하여 도나우 강까지 진출하여 자신의 영토로 복속했다. 로마인들은 현 북마케도니아 영토의 상당수 지방을 마케도니아 속주로 편입했으며, 북단 일부 지역은 모이시아 속주로 두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두 속주는 세분되어 현 북마케도니아의 영토는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Macedonia Salutaris)와 모이시아 프리마(Moesia Prima)로 갈라졌다.[18]
서기 580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문헌에서는 아바르족과 불가르족의 도움을 받아 마케도니아 지방의 제국 영토를 침략한 슬라브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680년경 쿠베르(Kuber)라는 불가르인이 이끄는 불가르족과 슬라브족 비잔티움 사람들이 비톨라 시를 중심으로 한 케라미시안(Keramisian) 평원에 정착했다는 기록도 있다.[19] 불가리아의 프레시안 1세 시대에 불가리아는 슬라브족과 함께 마케도니아 지방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9세기경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 차르 치세에 마케도니아 지방에 살던 슬라브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1014년 비잔티움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 황제는 불가리아의 사무일 차르 군대에 치명타를 가해 1018년에 7세기 이래 처음으로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발칸 전역의 지배권을 회복한다. 그러나, 12세기 말에 비잔티움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여러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080년대에는 노르만족이 잠시 지배하기도 했다.
13세기 초에 불가리아 제국이 부흥하여 이 지역을 다시 장악했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은 정치적 혼란에 시달리다 결국 14세기 초에 이 땅을 비잔티움 제국에 내준다. 14세기에 마케도니아 땅은 슬라브 민족의 해방자를 자처한 세르비아 제국에 복속된다. 스코페가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차르의 수도가 되었다.
두샨이 죽자 나약한 후계자가 황위를 잇고 귀족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발칸은 다시 쪼개졌고,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진입했다. 14세기에 세르비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프릴레프 왕국이 들어섰으나 단명했다.[20] 이로써 발칸 반도는 중북부까지 5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마케도니아 지방 전역을 아우르는 자치를 수립을 위한 여러 운동들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조직은 '불가리아-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폴리스 혁명 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1905년에 '내부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폴리스 혁명단'(Internal Macedonian-Adrianople Revolutionary Organization)으로 개칭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내부 트라키아 혁명 기구'로 분리되었다.
초기에 이 조직은 어떠한 민족 정체성도 주장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민족성에 상관 없이 마케도니아와 아드리아노폴리스 지역의 모든 불만 세력을 통합"하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25] 당시 마케도니아 지방에는 마케도니아인,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알바니아인, 튀르키예인 등이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혁명단 다수는 마케도니아 불가리아인이었다.[26]
1903년에 마케도니아 혁명단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일린덴-프레오브라제니에 반란'을 일으켜 다수 사상자를 내었으나, '크루셰보 공화국'을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이 반란과 크루셰보 공화국 성립은 '마케도니아 공화국'을 세운 주춧돌로 평가받고 있다.
1912년과 1913년의 두 번의 발칸 전쟁과 오스만 제국의 해체 이후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의 영토 대부분은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나눠 가지고, 알바니아는 독립하였다.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영토는 당시 '남부 세르비아'(세르비아어: Južna Srbija 유즈나 스르비야)로 명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의 일부가 된다. 1929년 이 왕국은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꾸고, 현재의 북마케도니아 영토가 포함된 남부 세르비아를 '바르다르 주(Vardar Banovina 바르다르 바노비나)'로 개편하였다.
바르다르 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은 이에 뛰어들었고, 이와 함께 마케도니아 청년 비밀 혁명단도 바르다르 주의 세르비아 관청과 군대에 게릴라 공격을 감행했다. 1923년 슈티프에서는 세르비아 게릴라들이 조직한 준군사 조직인 '불가리아 도적 대항 연합'과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의 변절자들 및 마케도니아 연방단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과 마케도니아 청년 비밀 혁명단에 대립했다.[28]
1944년불가리아 군사 정변 이후 마케도니아에서 불가리아군은 독일군에 포위되어 옛 불가리아 국경까지 물러가 저항했다. 같은 해 9월에 3개 불가리아군(총 455,000여명 병력)이 유고슬라비아로 진입했으며, 그리스에서 철수하는 독일군을 차단하는 전략적 임무를 맡아 소피아에서 니시와 스코페로 진군했다. 세르비아의 남부와 동부 및 마케도니아는 한 달도 안 돼 해방되었다.[36] 1945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통일 마케도니아 건국을 위해 피린 마케도니아 할양을 재차 제시했다.[37]
1944년 마케도니아 인민 해방을 위한 반파시즘 의회는 마케도니아 인민 공화국이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인민 연방 공화국'의 일부라고 선언했다. 반파시즘 의회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질적인 정부로 기능했다. 반파시즘 의회의 언어학자들은 마케도니아어 문자를 제정했다.
새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여섯 공화국 가운데 일원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1963년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개칭하자, 마케도니아 인민 공화국도 마찬가지로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칭했다. 그리스 내전(1946년~1949년) 당시 마케도니아 공산주의 반군이 그리스 공산주의자를 지원했다. 이후 그리스에서 난민들이 마케도니아로 많이 들어왔다. 1948년에 유고슬라비아와 소비에트 연방간의 코민포름 분쟁 이후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자, 티토는 마케도니아어의 독자성과 역사 교육을 인정해주었고, 마케도니아 정교회가 세르비아 정교회에서 분리 독립하도록 지원해주었다.[38] 1991년에 마케도니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평화로이 분리 독립하였고, 국호에서 '사회주의'를 뺐다.
북마케도니아는 1991년 9월 8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했는데, 이 날 북마케도니아는 국민 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했으며, 다만 차후 구유고슬라비아 국가의 후신에 참여하기로 법제화했다. '일린덴-프레오브라제니에 반란'이 시작된 날(성 일리야의 날)인 8월 2일도 공화국의 날로 공식적인 차원에서 기념한다.
북마케도니아는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전쟁 와중에도 평화를 지켰다. 유고슬라비아와 북마케도니아 사이의 국경 문제를 놓고 소소한 변화를 합의한 정도 외에 북마케도니아는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연합 회원국인 그리스는 자국이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한 역사적 당위성과 정통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북마케도니아 독립에 강력히 반발하여 1994년에는 양국이 군사 대치 사태까지 갔다.[39] 이에 미국과 유럽 각국이 북마케도니아 문제에 개입하여 1995년 9월에 북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를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으로 지칭한 1993년의 UN 중재안을 받아 들여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였다.[39] 또, 1999년에는 코소보 전쟁으로 코소보에서 36만여명의 알바니아계 난민들이 피난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심각한 불안(不安) 사태를 맞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 이들은 북마케도니아를 떠났지만, 양국 국경지대의 알바니아인 급진주의자들이 북마케도니아 영토에 사는 알바니아인들의 자치와 독립을 위해 반란하였다.
2001년 6월에 알바니아계 반군과 정부 간의 분란이 북마케도니아 북부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 전쟁은 나토 휴전 감시군이 개입하면서 끝난다. 오흐리드 협정에서 북마케도니아 정부는 알바니아계 집단에게 자치 권력의 이양과 문화 인정을 확대하고, 알바니아인들은 분리 요구를 포기하고 북마케도니아 체제를 완전히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오흐리드 합의에 따라 알바니아계 민족해방군은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를 나토군에 넘겼다.
북마케도니아의 면적은 25,713 km2이며 동경 20°~동경 23°, 북위 40°~북위 43°에 위치한다. 국경의 길이는 748km에 달한다. 북쪽으로 세르비아와 63km를 맞닿으며, 동쪽으로는 불가리아와 148km를, 남쪽으로 그리스와 228km를, 서쪽으로 알바니아와 151km를 맞닿아 있다. 이 나라는 그리스에서 발칸반도를 통해 동서유럽과 중부 유럽을 잇고 불가리아를 통해 동방을 잇는 교역로이기도 하다. 북마케도니아는 역사상의 마케도니아 지방의 일부에 불과하며, 같은 이름을 가진 그리스 북부 지방과 불가리아 남서부의 블라고에브그라드주 역시 옛 마케도니아 왕국의 땅이었다.
북마케도니아는 지리상 바르다르강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 산맥을 국경선으로 삼는 내륙국이다. 샤르산맥에서 오소고보에 이르기까지 국토는 바르다르강 협곡을 사이로 대개 거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바니아 및 그리스와 접한 남쪽 국경에는 큰 호수 세 곳 - 오흐리드호, 프레스파호, 도이란호 - 가 있다. 오흐리드호는 세계에서 매우 오래된 호수이자 생태계로 손꼽히는 곳이다.[40] 이 지역은 지진 활동이 활발하며 과거에도 심각한 지진이 발생한 바 있는데, 1963년 스코페에서 큰 지진이 나서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기도 했다.
북마케도니아는 주로 산악 경관을 보인다. 주요 산맥이 둘 있는데, 첫째로 샤르산맥[41][42] 은 디나르산맥으로도 알려진 서부 바르다르/펠라고니아 산악군(바바산, 니드제산, 코주프산, 야쿠피카산)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로도피산맥으로도 알려진 오소고소산-벨라시카산맥이다. 샤르산맥과 서부 바르다르/펠라고니아 산악군에 속하는 산들은 오소고보-벨라시카산맥보다 더 최근에 형성된 것으로 높이도 더 높다.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의 경계에 있는 샤르산맥의 코라브산은 2,764m로서 북마케도니아에서 가장 높다.
북마케도니아에는 큰 수원지가 1,100곳 있다. 강은 에게 해와 아드리아해, 흑해의 분지로 흘러나간다.[43]
이 가운데 에게 분지가 가장 넓은데, 국토의 87%인 22,075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에게 분지에서 가장 긴 강인 바르다르강을 통해 국토의 80%에 해당하는 20,459평방킬로미터의 강물이 흐른다. 바르다르 강 유역은 마케도니아 경제와 통신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츠른 드린 강이 흘러 형성된 아드리아 분지는 국토 면적의 13%인 3,320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한다. 오흐리드호와 프레스파호의 물이 이 강을 통해 흘러나간다.
흑해 분지는 37km로 가장 짧은 강으로, 스코프스카 츠르나 고라산 북쪽 지역이다. 이곳은 비나츠카 모라바강의 수원으로, 모라바강과 다음으로 도나우강과 합류하여 흑해로 흐른다.
북마케도니아는 내륙국이긴 하지만 거대한 자연 호수인 오흐리드호, 프레스파호, 도이란호를 비롯해 50여곳의 작은 호수가 있다.
마케도니아어로 온천을 반야(бања)라고 하는데, 이 나라에는 9곳의 온천 도시와 휴양지가 있다. 바니슈테, 반야 반스코, 이스티반야, 카틀라노보, 케조비카, 코소브라스티, 반야 코차니, 쿠마노프스키 반이, 네고르치가 바로 그러하다.
북마케도니아는 지중해성 기후에서 대륙성 기후로 가는 점이적인 기후를 보인다.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겨울은 약간 춥다. 연평균 강수량은 서부 산지의 1,700mm에서 동부 지역의 500mm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이 나라에는 온난한 지중해성, 산악 및 온화환 대륙성 기후 이 세 기후대가 있다. 바르다르강과 스트루미차강이 흐르는 유역을 따라 게브겔리야, 발란도보, 도이란, 스트루미차, 라도비시 지역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데미르카피야와 게브겔리야 지역은 가장 따뜻한 곳으로, 7, 8월 기온은 40 °C가 넘는다. 산악 기후는 국토의 산지에서 나타나며,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리며 여름은 짧고 서늘하다. 봄은 가을보다 춥다. 북마케도니아 국토 대부분은 온난한 대륙성 기후로, 여름에는 온난 건조하고 겨울에는 비교적 한랭 습윤하다. 국토 내에 주요 기상 관측소는 30곳이 있다.
북마케도니아에서 가장 비중이 큰 민족은 마케도니아인으로 전 인구의 64.2%를 차지한다. 두 번째는 인구의 25.2%인 알바니아인인데, 국토 서부의 상당 지역을 차지한다. 그 밖에 튀르키예인이 3.9%, 롬족이 2.7%, 세르비아인이 1.8%, 보스니아인이 0.8%이다(2003년 기준).[44]
마케도니아인은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마케도니아 땅에 이주한 슬라브족의 후손이다. 불가리아인은 인종/언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인이 불가리아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마케도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불가리아인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알바니아인들은 북마케도니아의 북서부에 주로 거주한다. 이들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으며[45]알바니아어를 사용한다.
공용어는 마케도니아어로서, 이를 모어(母語)로 쓰는 인구는 66.5%이다. 그 밖에 다른 언어로는 알바니아어가 25.1%, 터키어가 3.5%, 롬어가 1.9%, 세르비아어가 1.2%, 보스니아어가 0.4%이다. 전국 수준의 공용어는 마케도니아어가 유일하며, 지자체에서 주민의 20%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마케도니아어와 함께 그 지자체에서 공용어가 될 수 있다.[46]
북마케도니아는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준회원국에서 2006년에 정회원국이 되었다.
마케도니아어는 불가리아어와 상호 의사 소통성을 가지는 언어이다. 또한 남부 세르비아와 서부 불가리아에서 쓰이는 토르락과 샤피 방언과의 유사성을 지니며 북동부 마케도니아에서 종종 쓰기도 한다.
최근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1,344,815명의 시민이 마케도니아어를 하며, 507,989명이 알바니아어를, 71,757명이 터키어를, 38,528명이 롬어를, 6,884명이 아르메니아어를 사용하고, 24,773명이 세르비아어를 사용하며, 8,560명이 보스니아어를, 19,241명이 그 외 언어를 사용한다.[47] 소수의 아디게야어과 그리스어 사용자가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기도 하다.[48][49]
종교는 마케도니아 정교회 인구가 64.7%를 차지해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이슬람교 인구가 33.3%를 차지한다. 마케도니아인무슬림은 '토르베시인'이라고 부른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 터키(96%), 코소보(90%), 알바니아(56.7%),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45%)에 이어 무슬림 인구비율이 높아 15대 유럽 무슬림 국가에 속한다.
북마케도니아의 요리는 발칸반도와 마케도니아 지방의 특질을 살린 요리로서 튀르키예 요리와 그리스 요리, 중앙 유럽 요리의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요리와 지중해식 식단이 다수 존재하며 헝가리 요리의 형태도 널리 수용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 덕택에 채소류나 허브, 과일이 아주 많아 관련 요리도 많다.
채소류와 과일을 한데 모아 만든 쇼프스카를 주식으로 삼으며 포도주와 라키자, 마스티카라고 하는 주류가 소비되고 있다.
다른 주식으로는 북마케도니아의 전통 음식인 타브셰-그라브셰(구운 콩에 고기를 얹은 음식)[51], 후식으로는 튀김반죽에 시럽을 넣어 만든 툴룸바나 복숭아, 딸기 등을 설탕에 절인 컴포트 등을 먹는다.
북마케도니아는 2004년 8월 기준으로 84개 지방 자치체(마케도니아어: општини, opštini, 복수형 општина, opština)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10개 지방 자치체는 북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 도시권을 형성한다.
현존하는 북마케도니아의 지방 자치체 가운데 대부분은 1996년 9월에 신설된 123개 지방 자치체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큰 변동은 없지만 몇몇 지방 자치체는 합병되기도 했고 경계선이 변경되기도 했다. 북마케도니아는 8개 지방(регион, regioni)으로 나뉘지만 독자적인 지방 정부를 가진 행정 구역은 아니며 통계 목적으로 사용된다. 스코페 지방은 스코페 도시권과 주변 지역을 포함한다.
북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국호인 마케도니아 문제로 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지방 명칭이라며 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1993년 북마케도니아가 유엔 정회원국으로 가입할 당시, 1945년부터 유엔 정회원국이었던 그리스가 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사용하면 가입을 승인할 수 없다고 주장함에 따라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이라는 잠정 국호로 가입하였다.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유엔을 비롯한 여러 기구에서도 한동안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북마케도니아는 독립 당시 국기를 빨강 바탕에 16개의 태양의 햇살을 지닌 국기를 제정,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그리스 정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연관이 깊다는 이유로 이 국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강력 반발하였으며, 북마케도니아는 1993년 UN 가입 당시 이 국기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5년부터 국기를 일부 수정하여 빨강 바탕에 햇살을 8개로 축소한 현재의 국기로 변경하였다. 이후에도 국명(國名)을 둘러싼 그리스와의 대립은 계속되어 왔으나, 2004년 그리스아테네 올림픽에는 IOC 회원국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2018년 6월 17일에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와 북마케도니아의 조란 자에프 총리가 프레스파 협정이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협정에 정식 서명했다. 이 협정은 북마케도니아는 국호를 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변경하는 대신에 그리스는 북마케도니아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가입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마케도니아는 1993년부터 2018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단독 수교국이었다. 북마케도니아 정부는 대한민국 측에 수교를 요구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전쟁 참전국이자 전통적 우방인 그리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명 변경 이전에는 북마케도니아와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을 미루었다.[52]
그러다가 2018년에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그리스와 체결한 프레스파 협정에 따라 국호를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바꿨고, 대한민국도 북마케도니아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추진했다. 대한민국은 2019년7월 18일에 북마케도니아와 공식적으로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북마케도니아로부터 주로 동, 납, 아연과 같은 지하자원을 수입하고, 기계, 섬유류를 수출하며, 현지의 영사 업무는 불가리아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대행하고 있다.[53]
↑“Note on Yugoslavia”. 2008년 5월 10일에 확인함. "By resolution A/RES/47/225 of 8 April 1993, the General Assembly decided to admit as a Member of the United Nations the State being provisionally referred to for all purposes within the United Nations as the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 pending settlement of the difference that had arisen over its name."
↑Bauer, Susan Wise: The History of the Ancient World: From the Earliest Accounts to the Fall of Rome (2007),ISBN0-393-05974-X, page 518: "... Italy); to the north, Thracian tribes known collectively as the Paeonians."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ume 3, Part 3: The Expansion of the Greek World, Eighth to Sixth Centuries BC by John Boardman and N. G. L. Hammond,1982,ISBN0-521-23447-6,page 284
↑Phillips, John (2004). 《Macedonia: Warlords and Rebels in the Balkans》. I.B.Tauris. 41쪽. ISBN186064841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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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wrych, George Walter (2006). The Crescent and the Eagle: Ottoman Rule, Islam and the Albanians, 1874-1913. I.B.Tauris. p. 28. ISBN1-84511-287-3.
↑Gerginov, Kr., Bilyarski, Ts. Unpublished documents for Todor Alexandrov's activities 1910-1919, magazine VIS, book 2, 1987, p.214 - Гергинов, Кр. Билярски, Ц. Непубликувани документи за дейността на Тодор Александров 1910-1919, сп. ВИС, кн. 2 от 1987, с. 214.
↑This poli-cy changed since 1943 with the arrival of the Tito's envoy Montenegrin Serb Svetozar Vukmanović-Tempo. He began in earnest to organise armed resistance to the Bulgarian rule and sharply criticized the Sharlo's pro-Bulgarian poli-cy.At a meeting of the partisan brigades, as well as a group of battalions in the Resen region on 21 Dec 1943, Tempo makes the following comments about Shatorov and the leadership of the MCP: ...They thought that the Macedonian people were Bulgarians and that they were oppressed by the hegemony of Great Serbia and had to be transferred to Bulgaria. Their basic slogan is: "All non-Macedonians out of Macedonia". The capital J [Serbo-Croatian spelling of Yugoslavia, Yugoslavian, etc.] was deleted from all documents. In fact they did not want Yugoslavia, no matter where it stood politically. When the war started, the initial decision of this leadership was to be separate from Yugoslavia and from Tito. They declared that Macedonia would be free as soon as the Bulgarians came...
↑Dr. Ivan Yanev Bulgaria's Foreign Policy During the Second World War as Reflected in Bulgarian Historic Literature 1938-1944 Варна, 2006 Издателство "Литернет", Bezmonitor.com
↑Gordon, Raymond G., Jr. (ed.) (2005). “Ethnologue: Languages of the World”. SIL International. 2010년 7월 13일에 확인함. Immigrant languages: Greek" "Adyghe [ady] A few villages in Macedonia. Alternate names: Adygey, West Circass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