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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평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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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평양성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명나라군의 모습.
날짜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 ~ 2월 9일(음력 1월 9일)
장소
결과 조명연합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교전국

지휘관
조선
평안도도제찰사 류성룡
도원수 김명원
경상도순변사 이일
우측방어사 김경서
좌측 방어사 정희현
황해도방어사 이시언
황주판관 정화
금강산승병장 사명대사
묘향산승병장 서산대사
명나라
총사령관 이여송
중군 부총병 이여백
좌군 부총병 양호
우군 부총병 장세작
부총병 오유충
참장 이녕
부총병 조승훈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쓰라 사다무  
병력
조선군 8,000명
승병 3,000명
명나라 원군 43,000명
합계 54,000명
15,000명
피해 규모
수천명 전사 수천명 전사

제4차 평양성 전투(第四次平壤城戰鬪)는 4차례의 평양성 전투조명연합군일본군의 가장 규모가 큰 대 전투이다.

조승훈의 1차 원병군의 패전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는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총사령관으로 삼아 43,000명의 군사를 주어 2차 원병으로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그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유격장군 심유경을 보내 휴전 협상으로 시간을 끌게 하였다.

1593년 1월 15일(1592년 음력 12월 13일) 명나라의 첫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1월 27일(음력 12월 25일) 이여송의 주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선조가 있던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에서도 명군에게 식량과 물자를 대주고 도원수 김명원과 우측 방어사 김경서, 좌측 방어사 정희현 등 총 8,000명의 군사를 주고 서산대사사명대사도 승병 2,2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조명 연합군평양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휘하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토모는 이를 거절하고 한양 방면으로 철수하여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은 성 방어를 위한 시설을 만들어 평양성을 난공불락 요새로 바꾸고 모란봉에는 2천 명의 조총 부대를 배치시켰다.

조명연합군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김응서함구문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오유충조선의 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해 거짓으로 패한척 후퇴하다가 다시 반격하여 승리했다. 하지만 조선군 8,000명이 남쪽 함구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2월 7일(음력 1월 7일) 새벽 일본군 3천명이 명나라양호, 이여백, 장세작 등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명나라군의 이를 물리쳤고 조명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김경서의 기병대가 일본군을 유인하게 했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이후 조명연합군은 2일 동안 탐색전을 하여 일본군을 관찰하다가 2월 8일(음력 1월 8일) 대공세를 가했다. 명나라군의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수많은 대포들을 평양성에 집중사격하고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조선이일, 김경서의 8천명 군사가, 칠성문장세작이, 보통문양호가, 모란봉오유충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자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를 지휘해 사기를 올렸다.

조명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만수대을밀대로 압박했고 일본군은 풍월정 아래에 굴을 파 최후의 공격을 가했다. 격렬한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맺어 추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뒤 이날 밤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명군의 참장 이녕의 3천명 군사가 추격에 나서 358명을 사살했고 조선군도 추격에 나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60명을,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 등 총 538명을 사살했다. 이리하여 평양성은 7개월만인 2월 9일(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하던 일본군은 봉산 - 용천(서흥군) - 배천을 거쳐 한양으로 철수했으나 그 과정에서 18,700명에 달하는 병력이 6,600명으로 감소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그러나 이후 평양성 탈환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명나라군의 남병들이 이여송이 약속한 5,000냥의 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여송은 후방 의주에 남병 1,300명을 유인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은 공을 세우지 못하자 자기 휘하의 군사들 중 허약한 군사들 60명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선조평양성이 탈환되자 2월 18일(음력 1월 18일) 의주를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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