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장수
설장수(偰長壽, 1341년∼1399년 11월 5일(음력 10월 19일)[1])는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자(字)는 천민(天民), 호(號)는 운재(芸齋)[2]이다.
원(元)에 귀부한 위구르인의 후손으로 1358년(공민왕 7년) 아버지를 따라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로 피난왔으며, 이후 고려에 귀화해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조선 교체기 때 대명 외교를 맡아 여덟 번 중국에 사신으로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였다.
생애
[편집]《정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서, 설장수의 선조를 위구르(回鶻) 고창(高昌)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 아버지 설손은 원의 숭문감승(崇文監丞)을 지낸 인물로[3] 1358년(공민왕 7년)에 가족을 이끌고 고려로 피난해왔고, 공민왕은 예전 알고 지냈던 적이 있는 그에게 전택(田宅)을 주고 부원후(富原侯)[4]로 봉하였다.[5] 설장수의 조카인 설순과 세종과의 대화를 보면 설장수가 고려에 올 당시에 한국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 설장수는 서역인이라는 이유로 1360년(공민왕 9년) 경순부사인(慶順府舍人)으로 있던 중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공민왕이 특별히 상복을 벗고 기복시켜 과거를 보게 했다.[7]
성품은 곧고 민첩하면서 굳세고 말을 잘하여 칭송받았다. 공민왕 10년(1361년)에 22세로 동진사과(同進士科)에 합격하여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오른 뒤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냈으며 그때의 경험으로 공민왕 15년(1366년)에 해안을 침범하는 왜구(倭寇)를 방비하기 위한 계책을 올렸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1] 우왕(禑王) 13년(1387년) 2월에 지밀직사로서 표문을 받들고 명에 가서, 앞서 공민왕 8년에 홍건적을 피해 요동에서 고려로 도망쳐 온 이타리불대(李朶里不歹) 등 심양의 군사와 백성 4만 호를 명에서 조사하여 찾아가려 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고려의 관복(冠服)을 명의 제도대로 사모(紗帽)-단령(團領)으로 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이후 사모 - 단령은 정몽주(鄭夢周) 등의 주장으로 고려의 관복으로 보급되었다.[7] 우왕 14년(1388년) 2월에 명에서 돌아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귀속시키라고 한 홍무제(洪武帝)의 말을 전했다.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昌王)이 즉위하게 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명에 가서 우왕이 창왕에게 손위하였음을 알리는 표문을 전했다.[7]
공양왕을 세우는 모의에 참여한 공으로 공양왕 원년(1389년) 여름에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8] 다음 해(1390년)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승진하였다.[9] 그 다음 해(1391년)에는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고,[10] 공양왕 4년(1392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게 되었다.[11] 한편 이성계와는 즉위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뒤 정몽주의 도당으로 몰려 이성계가 즉위한 해에 우현보, 이색 등과 함께 바닷섬으로 유배되지만[12] 이듬해 다시 수도 가까운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고,[13] 이때 입조하여 자신을 용서해준 은혜를 왕에게 사례하였다.[14]
태조 3년(1394년)에는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로서 사역원의 시험 자격과 선발 액수 등에 대한 진언을 올렸고,[15] 태조 5년(1396년) 판삼사사가 되었다.[16] 같은 해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제수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1] 11월에 계림(鷄林)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계림 설씨(경주 설씨) 집안을 열었고,[17]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18]
태조 6년(1397년) 권근과 함께 원종공신에 녹권되지만,[19] 종묘 납향제(臘享祭)의 헌관으로서 삼사(三司)의 서약 의식에 지각한 죄를 물어 파면되었다.[20]
태조 7년(1398년) 3월에는 태조의 어진을 경주에 봉안하는 임무를 맡았다.[21]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자,[22] 11월에 계품사(啓稟使)로서 이를 고하는 임무를 띠고 예조전서(禮曹典書) 김을상(金乙祥)과 함께 파견되었는데,[23] 사신의 행차가 요동의 첨수참(甛水站) 파사포(婆娑鋪)에 이르렀을 때 명에서 홍무제가 붕어하고, 요동도사(遼東都司)로부터 "3년에 한 번 조빙하기로 한 것과는 어긋난다"며 저지당했다.[1] 의주(義州)로 돌아온 설장수는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에게 "매년 조빙할 것을 청하여 다시 아뢰든지 아니면 진향사(進香使)로 뽑아 보내자."고 보고하여, 다시 정종 1년(1399년) 1월에 진향사(進香使)에 임명되어 김사형(金士衡) · 하륜(河崙)과 함께 명의 서울에 갈 수 있었다.[24] 6월에 명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귀국하여 태평관에서 이를 치하하는 연회를 받았으며,[25] 10월 19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1] 향년 쉰아홉 살이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권근은 그를 애도하는 제문을 썼다.[26]
설장수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시문 초고 7책을 엮어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 13권을 지었으나 홍건적의 난으로 소실되고, 이후 기억나는 것을 기록하여 다시 두 질(秩)로 만들었으나 간행하지는 못했다.[27] 《소학》(小學)을 중국어로 해석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지었으며, 이 공로로 세종 23년(1441년) 그의 아들들이 관직에 등용되었다.[28]
결혼과 자손
[편집]설장수는 두 번 결혼해 세 아들 설내(偰耐), 설도(偰衜), 설진(偰振)을 두었다. 전처(前妻)의 인물 정보는 알 수 없고, 후처(後妻)는 최함(崔咸)[29]의 손아랫누이다.[30] 설내(偰耐)는 전처가,[30] 나머지 두 아들은 후처가 낳은 것으로 보인다.[1]
저서 및 작품
[편집]문집으로 《운재집》(芸齋集)이 있었으나,[31]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지금은 《동문선》에 그의 시 9수가 《근사재일고》 발문과 함께 실려 있다.
글씨에 능했는데, 《용재총화》에 따르면 손수 《목은집》(牧隱集)을 베껴 썼는데 필법이 굳세어 규범이 있었다[32]고 한다.
참고 자료
[편집]- 《고려사》
- 《목은문고》
- 《양촌집》
- 《용재총화》
- 《대관재난고》
- 《연려실기술》
- 《조선왕조실록》: 태조·정종·태종·세종실록
전기 자료
[편집]- 《고려사》 권112, 〈열전〉25, 설손 부 설장수
- 《정종실록》 권2, 정종 1년(1399년) 10월 19일(을묘) 3번째 기사
설장수가 등장한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정종실록》 권2, 정종 1년(1399년) 10월 19일(을묘) 3번째 기사
- ↑ 이 호는 심의, 《대관재난고》 권4, 〈기몽(記夢)〉에 “芸齋偰長壽”라고 보인다.
- ↑ 《태종실록》 권29, 태종 15년(1415년) 3월 4일(임인) 2번째 기사
- ↑ 부원(富原)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과 마포구에 해당한다.
- ↑ 이색, 《목은문고》 권7, 근사재일고 후서; 《고려사》 권112, 〈열전〉25, 설손. 〈졸기〉에는 부원군(富原君)으로 되어 있다.
- ↑ 《세종실록》 권 27, 세종 7년(1425년) 1월 16일(정해) 1번째 기사
- ↑ 가 나 다 라 《고려사》 권112, 〈열전〉25, 설손 부 설장수
- ↑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원년(1389년) 12월 29일(계해)
- ↑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2년(1390년) 11월 6일(갑오)
- ↑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3년(1391년) 12월 24일(병자)
- ↑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4년(1392년) 4월 6일(정사)
- ↑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1392년) 7월 28일(정미) 3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1393년) 1월 1일(정미) 2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1393년) 1월 24일(경오) 1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1394년) 11월 19일(을묘) 3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10, 태조 5년(1396년) 7월 27일(임오) 1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10, 태조 5년(1396년) 11월 23일(정축) 2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10, 태조 5년(1396년) 11월 23일(정축) 4번째 기사; 《태조실록》 권11, 태조 6년(1397년) 4월 17일(기해) 1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12, 태조 6년(1397년) 12월 24일(임인) 2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12, 태조 6년(1397년) 12월 29일(정미) 2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13, 태조 7년(1398년) 3월 6일(계축) 3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1398년) 9월 5일(정축) 3번째 기사
- ↑ 《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1398년) 11월 30일(임인) 1번째 기사
- ↑ 《정종실록》 권1, 정종 1년(1399년) 1월 9일(경진) 7번째 기사
- ↑ 《정종실록》 권1, 정종 1년(1399년) 6월 27일(병인) 2번째 기사; 7월 19일(정해) 2번째 기사
- ↑ 권근, 《양촌집》 권23, 門下府祭判三司事偰公 長壽 文
- ↑ 이색, 《목은문고》 권7, 근사재일고 후서
- ↑ 《세종실록》 권93, 세종 23년(1441년) 8월 11일(을해) 3번째 기사
- ↑ 최함은 이미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1392년)에 설장수의 인척이라는 까닭으로 관직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 4년(1392년) 5월 20일(경자).
- ↑ 가 나 《태종실록》 권2, 태종 1년(1401년) 9월 26일(임자) 2번째 기사
- ↑ 《연려실기술》 권1, 〈태조조 고사본말〉, 태조조의 명신, 설장수에 《운재집》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운재집》이 이긍익 당시까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 ↑ 성현, 《용재총화》 권10